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결과 ==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파란이었다. 신민당은 전국 합산 29.3%의 지지율로 지역구 50석 + 전국구 17석을 얻어 총 67석으로 제1야당으로 등극하는 건 물론 서울 및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과 호각을 다투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에서 민정당은 겨우 27.3%를 득표한 것에 그친 반면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을 올렸는데, [[중선거구제]]라서 호각이었지 만약 [[소선거구제]]로 치러졌으면 대도시 지역의 의석수를 대거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중선거구제라도 저정도 득표율이면 의석차가 더 벌어질 법도 한데, 민한당 후보들이 신민당 돌풍의 유탄을 맞아 3위로 밀리는 바람에 여당이 거의 어부지리격으로 13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구 또한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 총합인 49%에 맞춰 고르게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으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나올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다음 선거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3대 총선]]의 [[전국구]] 배분 방식으로 배분해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3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1위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얻는 방식으로 조정되었다.] '''민정 133 vs 야당+무소속 143'''으로 여소야대가 나온다. 이러니 당시 선거 결과에 대한 전두환의 반응은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았던게]] 당연지사.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묘사한 바로는 전두환이 의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짚으면서 분노한 반응을 보이다가,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는 [[노신영]] 안기부장의 보고에 '''"전국구가 있으니까, 그 정도나마 얻은거 아냐! 안기부는 선거 분석이 왜 그 모양이야?!"'''라면서 역정을 낸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신민당 돌풍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들의 정권 심판론에다가 '''[[김대중]]이 선거 나흘 전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과감한 귀국을 한 것 또한 한몫했다.'''[* 다만 김대중 본인은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보다는 비록 관제 야당이지만 조직 자체는 어느 정도 굳건한 민주한국당이 제1야당으로 유력하다 생각하여 [[민주한국당]]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 대표적으로 김대중과 막역했던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아들인 [[정대철]]이 [[종로구]]-[[중구(서울특별시)|중구]]에 민한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3위로 낙선하는데 그쳤다. 그만큼 국민들의 표심이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김대중의 예상조차 빗나가게 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약 2년 전인 [[1983년]]에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다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김대중 또한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을 우려한 미국의 정치인, 언론인 등이 비행기에서부터 그를 에워싸 [[김포국제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했으며 이 모습은 국민들에게 아직 민주투사들의 활동은 죽지 않았으며 미국이 지지한다는 것을 내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심지어 이 때 '''[[김영삼]]이 직접 김포공항까지 김대중을 마중나가려고 했었으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전두환 정권]]이 사전에 상도동 자택을 에워싸 결국 실패했다. 참고로 이 때 입국장에는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기 위해 안기부 요원 및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미국 인사들에게 무력을 휘두르면서까지 김대중을 끌고 갔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동행했던 전직 외교관인 로버트 화이츠 왈, '''"한국 경찰들이 우리한테 폭력을 휘두르는데, [[1988 서울 올림픽|3년 뒤]]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에 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편, 민주정의당은 예상보다 적은 의석을 얻었으나 여당에게 지극히 유리하게 짜여진 선거제도 탓에 과반은 유지했다. 하지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은 제도상으로도 불리한 마당에 신한민주당에 밀리면서 제대로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참패를 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민주정의당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심지어 민주한국당은 관제야당이었지만 은근슬쩍 신한민주당과 공조하는 모양새까지 보였으니.. 앞서 말했듯 선거 결과에 격분한 [[전두환]]은 총선 판세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당시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을 해임했고[* 다만 노신영의 외교적 안목이 워낙 탁월했던 터라 해임으로 끝내는걸 전두환 본인이 매우 아깝게 생각했고, 예전 직책인 외무부 장관에 재기용하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부총리급인 안기부장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보내는건 모양새가 안 좋았기에, 결국 [[국무총리]]로 발탁하면서 사실상 경질의 탈을 쓴 영전이 되어 버렸다.] 대통령경호실장인 [[장세동]]을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발탁했다.[* 장세동은 전임자 노신영과 달리 강경하게 안기부를 운영하며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민주한국당 의원 상당수는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야당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KBS 시청료 거부운동과 [[인천 5.3 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여기엔 노신영 본인의 '한계'도 작용했다. 본래 노신영은 정통 [[외교관]] 출신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활동할 때도 해외 첩보 및 대외 공작 분야에서는 전공을 살려서 제법 좋은 성과를 냈지만 이런 국내 정치 공작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했던 것. 실제 신민당은 이후 내각제 개헌([[이민우 구상]]) 파문으로 양김계에 속한 대다수 의원들이 [[통일민주당]]으로 옮겨졌으나, 그럼에도 어찌됐든 1987년 [[6월 항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선거 결과 분풀이 격으로, 전두환에게 여러모로 밉보였던 재벌 '''[[국제그룹]]이 해체'''된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국제그룹이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이니만큼 [[양정모(1921)|양정모]] 회장이 부산에서 여당의 승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의중이었는데, 부산의 6개 선거구 총 12석 중에 '''여당 의석수는 고작 3석밖에 안 나오는 바람에...'''[* 사실 양정모 회장은 [[일해재단]] 건부터 시작해서, 기업사정도 좋지 않은데 정치자금으로 사실상 삥을 뜯는 군부정권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신민 6, 민한 2, 국민 1. 무려 3개 선거구에서 민정당이 '''3위'''로 낙선했다. 국제그룹뿐만 아니라 똑같이 전두환의 미움을 받아온 [[김준엽]] [[고려대학교]] 총장도 경질을 피할 수 없었다. 총선 다음날 [[손제석]] 청와대 교문수석과 [[권이혁]] 문교부장관은 고려대에 감사를 실시해 전년도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민정당사 점거농성]] 학생들의 처벌에 소극적인 김 총장을 사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김 총장이 압력을 거부하자, 개각 후 새로 부임한 신극범 청와대 교문수석과 손제석 문교부장관은 다시 고려대 감사를 실시해 교직원 자녀 특례입학을 문제삼아 3월 8일부로 김준엽 총장을 쫓아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김 총장에 학교 출입금지 및 외유를 강요했다. 서울에서 민정당은 고작 27% 득표에 그쳤지만, 민한당 후보들이 신민당 돌풍의 유탄을 맞아 3위로 밀리는 바람에 어부지리격으로 13석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반해 부산에서는 신민 - 민한 양당이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은근슬쩍 공조를 했고, 그 결과 3개 선거구에서 민정당을 3위로 끌어내린 것. 물론 민한당으로 표가 분산되면서 부산 지역 신민당 득표율이 서울에서보다 다소 낮은 36%대에 머물렀지만 그만큼 민정당의 의석수를 빼앗는 효과가 있었으며 만약에 타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거전략을 썼으면 민정당이 과반은 고사하고 원내 1당조차 못 오를 수도 있었다.[* 만약 전국적으로 신민-민한 양당이 암묵적인 공조를 해서 민정당을 3위로 밀어낸 곳이 더 많은 동시에 신민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실제 지역구 의석수가 민정 87, 신민 50석으로 37석 차이인데, 민정당이 3위로 떨어지고 신민당이 차지한 지역이 딱 19곳만 더 있었어도 '''민정 68, 신민 69'''로 뒤집혀서 신민당이 전국구 총 의석수의 2/3인 61석을 독식하여 '''민정 85±α, __신민 130__'''이 되어버린다. 이러면 민한당 하나만 신민당과 공조해도 야권이 160±α로 거대해졌을 테고 그야말로 전두환 정권에 강력히 맞설 수 있는 원동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물론 이랬다면 당시 막가파 군부정권이 [[의회해산]] 등 막장 행보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6월 항쟁]]은 2년 먼저 재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의회 해산 관련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화국]]에서는 대통령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이 있었다. --삼권분립 저리 가라-- 물론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제3공화국|의회 해산권이 없음]]에도 [[10월 유신|의회를 해산]]하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도 있긴 하지만. 당시 군부정권이 어디서 배웠겠는가?] [youtube(BRUrC_vkr1k)] 이 영상은 당시 총선 당일 [[MBC 뉴스데스크]]이다. 당시 선거 개표방송 특집 뉴스에서도 첫 뉴스가 [[전두환]] 내외가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는 소식인 것을 보면 선거 개표방송에서도 [[땡전뉴스]]를 엿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